조셉 월피(1915-1997)
조셉 월피는 행동치료에 혁명을 일으킨 상호억제적 기법들과 체계적 둔감법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행동치료자이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위트와테르스란트대학교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피는 남아프리카에서 군의관 생활을 했고 이를 통해 오늘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분류되는 전쟁신경증 사례를 접하게 됐다. 그 후 그는 스탠포드대학교의 행동과학센터 연구원을 거쳐 버지니아대학교와 템플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저서로는 『상호억제에 기초한 정신치료법』, 『행동치료 기술들』,『행동치료의 실행 』,『우리들의 무익한 공포들』등이 있다.
조셉 월피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의관으로 일하며 많은 전쟁신경증 환자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전투에 참여한 후유증으로 정신과적인 혼란을 나타냈다. 월피는 전쟁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오이디푸스 갈등을 분석하고 다루는 것에 회의감을 품었다. 그러던 중 그는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 형성의 원리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전쟁신경증과 파블로프의 실험신경증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듯했다. 월피는 만약 불안 증상이 실험실에서 유도될 수 있는 것이라면 치료 역시 실험적 기법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처음에 월피는 고양이를 대상으로 신경증 치료 실험을 진행했다. 평범한 고양이를 실험실로 데리고 와서 자동 경적기 소리를 들려준 다음 전기충격을 주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하면 고양이는 실험실 연구원을 보기만 해도 몸을 웅크리고 소리를 지르는 불안 증상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고양이는 이틀을 굶주린 후에도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것은 고양이에게 실험신경증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월피는 만약 고양이가 먹이를 다시 먹도록 만들 수 있다면 불안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러한 원리를 그는 상호억제라고 불렀다. 처음에 월피가 실험 상자 속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줬을 때 신경증 상태의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월피는 실험 상자 밖에 고양이를 두고서 먹이를 주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실험실 구석으로 이동했고 먹이를 먹지는 않았다. 다음 날에 월피는 실험실 옆방으로 고양이를 데리고 가 먹이를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변을 거닐기는 했지만 역시 먹이를 먹지는 않았다. 그 다음 날 월피는 고양이를 옆 건물로 데리고 가 먹이를 주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조심스럽게 방안을 탐색한 뒤 먹이 냄새를 맡고서 게걸스럽게 먹이를 먹어치웠다. 그 다음부터는 실험을 역순으로 진행했다. 먼저 원래의 실험실 옆방으로 데리고가 먹이를 먹였고 또 그 다음 날에는 실험실로 데리고 가 먹이를 먹였다. 나중에 가서는 고양이가 실험 상자 안에서도 먹이를 먹게 되었다. 심지어는 처음에 실험신경증을 유발하게 만든 경적음이 들린 직후에 먹이를 주더라도 1분도 채 안 되어 먹이로 다가가 먹이를 먹고서 안정을 되찾았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수록 고양이는 불안 행동을 더 적게 나타냈다. 마침내 월피는 고양이의 실험신경증을 치료 할 수 있었다.
월피는 신경증 고양이를 치료할 때 사용한 원리를 신경증 환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기법을 개발하였다. 월피는 주로 공포증을 가진 성인을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환자들이 불안을 억제할 수 있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 자신이 두려워하던 상황이나 자극에 있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긍극적으로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물론 이 때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불안과 양립할 수 없는, 그래서 불안을 억제하는 효과가 큰 '다른 행동'을 잘 선택해야 한다. 월피는 자기주장, 성적인 반응, 이완 등 다양한 행동들을 가능한 대안으로 고려했으며 최종적으로 근육이완이 가장 효과적임을 확인하였다. 불안은 다양한 신체적 반응(심장박동 증가, 호흡 증가, 동공확대, 근육 긴장 등)을 동반하는데, 근육이완은 훈련을 통하여 조절이 비교적 쉬울 뿐만 아니라 불안의 신체적 반응을 억제하는 효과가 크다. 즉 근육이 이완된 상태로는 불안해지기가 힘들며 따라서 근육이완을 충분히 유도할 수 있다면 불안은 감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이완 반응이 불안 반응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이완이 불안보다 더 강해야 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낮은 불안 상태에서 이를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정도의 이완 반응을 유도해야 한다. 만약 불안이 너무 강할 경우 환자는 이완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치료의 초기에는 가장 낮은 불안 유발 상황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불안의 정도를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 치료자는 환자의 문제를 자세히 평가하여 불안의 단계를 정하고 단계적으로 둔감화를 실시하는 것이다.
셋째, 월피의 환자들 중에는 불안의 원인이 특정한 물리적 대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비난,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추상적인 경우가 매우 많았으며, 때로는 물리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치료를 위해 그 상황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예를 들어 비행기 타기) 이러한 경우에 실제 상황을 직면하도록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환자들이 자기가 두려워하는 상황을 상상하도록 하는 것이 대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근육이완 훈련으로 이끌어낸 높은 정도의 이완상태와 자신이 두려워하는 상황을 상상으로 경험하는 것을 짝지움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체계적 둔감법은 환자가 눈을 감고 이완된 상태에서 실시한다. 처음에는 불안이 없는 중립적인 장면을 제시하고 상상하도록 하며, 충분히 이완상태로 있을 때 불안 위계표에서 가장 낮은 불안유발 장면을 상상하도록 지시한다. 점차 단계적으로 불안의 위계 수준을 올려나가며 도중에 불안을 느끼면 중단한다. 휴식을 가진 뒤 다시 이완을 시작하고 환자는 계속해서 불안의 위계를 올려나간다. 체계적 둔감법은 공포를 치료하는 데 적절한 기법이지만, 공포의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악몽 · 신경성 식욕부진 ·강박관념·
충동적 행동·말더듬·우울증 등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