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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험,죽음의 수용소

by 오늘도웃자쏭 2025. 5. 24.

빅터 프랭클(1905-1997)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의사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빈대학교에 입학하여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무의식적 신 」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와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는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치료를 창안하게 된다. 의미치료에서는 환자나 내담자가 삶의 의미와 그는 빈의과대학의 책임감을 스스로 찾게끔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신경학 및 심리치리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오스트리아 심리의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죽음으 수용소에서 』,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 『삶의 의미를 찾아서 』등이 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유대인 중 한 명이다.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은 의학 교과서가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의학 교과서는 사람이 일정 시간 동안 잠을 못 자면 견딜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은 양치질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타민이 심각하게 결핍되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잇몸은 더 건강해졌다. 오히려 그 곳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는 견디기 힘든 모욕을 받는 것이었다. 

독일군들은 유대인들을 '돼지'라고 불렀고 또 돼지처럼 취급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빅터 프랭클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사건은 자신이 평생 동안 모아온 임상 자료를 정리해놓은 출판용 원고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개인적인 소지품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품에 안고 지내던 소중한 원고를 수북하게 쌓여 있는 소지품 더미에 내려놓아야 했다. 그때 그는 선배 입소자에게 통사정을 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욕설뿐이었다. 당시에 그에게는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원고와 같은 정신적인 유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절망과 사투를 벌이고 또 발진티푸스로 열병을 심하게 앓은 다음에 그는 원고가 인쇄되는지 여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되물었다. 그 후 그는 원고를 잃은 것을 더 이상 불평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원고의 가치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된 다음부터는 어떠한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의 삶의 의미를 결코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프랭클은 아우슈비츠가 주는 고통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서 억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마치 그러한 고통이 이미 과거에 지나간 사건이며 자신이 전쟁이 끝난후에 아우슈비츠 경험들을 회상하면서 심리학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사건을 바라보는 틀을 당사자가 아닌 과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학자의 것으로 바꾸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삶은 전적으로 독일군들의 기분이 어떠하냐에 따라 좌지우지되었으며 스스로 자신의 문제들에 관해 결정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특히,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의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다. 독일군이 그저 손가락으로 유대인을 가리키기만 하더라도 그 유대인은 가스실로 끌려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프랭클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들은 예상하고 최대한 대비하면서 생활했다. 

그는 유대인 병원의 신경학과 주임으로 일하고 있던 덕분에 부모님과 가족들을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간신히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다면 그 즉시 남아 있는 가족들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밤잠을 못 이루던 어느 날 그는 집으로 돌아 갔을 때 탁자 위에 대리석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아버지가 유대교 교회당 터에서 주워온 것이었다. 대리석 조각에는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었다. 십계명 중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절이었다. 그 구절을 보는 순간에 그는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건이 일종의 신의 계시라고 믿고서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적어도 빅터 프랭클의 삶에서는 아우슈비츠의 고통이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전부터 앞으로 겪을 고난들을 실감나게 예상함으로써 미리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지옥 같은 생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프랭클을 악몽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후유증으로 고통 받던 시기에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아우슈비츠 시절의 일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저서들을 집필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실존적 의미치료법을 창안했다. 

프랭클 자신도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수의 사례만으로도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론이란 외부 상황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큼은 결코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미치료법에서는 조건적인 가치를 갖는 일들(세속적인 성공)에서 심리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삶에서 무조건적인 가치를 갖는 일들(삶의 심리적 완성)에 새롭게 눈을 뜰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수기를 발표하고 또 그 경험을 심리치료 과정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작업을 통해 내면의 고통을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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