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의 심리학자 칙센미하이가 개념화한 몰입이란 어떤 활동에 깊이 빠져서 시간이나 공간, 타인의 존재나 심지어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는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운동이건 독서건 너무 몰입한 나머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몰입은 집중력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집중력이란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부담스럽고 힘들다는 느낌을 주지만, 몰입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빠져들어가는 것으로 전혀 힘이 들지 않는 상태로 행복감을 준다.
몰입을 영어로는 'flow 흐름'라고 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이 사실은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몰입을 자주 경험한다고 보고한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보고한 사람들을 나누어 실험실에서 불빛과 소리 같은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면서, 이들의 대뇌피질의 활성화 정도를 측정했다. 자극에 주의를 기울일 때, 피질의 활성화를 통해 정신에너지를 어느 정도 소비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연구 결과 몰입을 자주 경험하지 않는다고 보고한 학생들은 예상한대로, 자극에 집중해야 할 때 피질의 활성화 정도가 평소보다 증가했다. 이것은 주의 집중을 할 때 애를 쓰면서, 정신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몰입을 자주 경험한다고 보고했던 학생들의 결과는 이와 반대였다. 과제에 집중했을 때 활성화 수준이 평소보다 더 떨어진 것이다. 즉 주의 집중을 하는 순간에 정신적인 노력이 오히려 덜 필요했던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몰입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자극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순간마다 무엇이 적절한지 결정해 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능력이다. 정신분열처럼 심각한 정신장애부터 가벼운 우울증까지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양한 자극들에 주의가 분산되어 주의 집중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선택할 수 있는 주의 집중 능력을 가지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필요한 자극에만 주의를 집중하느냐, 아니면 너무 많은 자극에 주의를 기울여서 마음이 힘들어지느냐는 초보자와 전문가의 차이다.
칙센미하이는 오랜 연구를 통해 몰입이란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지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 운동선수들이 말하는 '물아일체의 상태'와 같은 심리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활동을 하면서 몰입 상태를 경험하지만 그 순간의 경험을 묘사하는 방식은 놀라우리만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입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칙센미하이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몰입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첫째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다. 사람들은 장기나 바둑 같은 게임이나 테니스나 농구 같은 운동을 할 때 곧잘 빠져들곤 한다. 또한 등산이나 음악 연주, 뜨개질이나 외과의사가 하는 수술도 목표와 규칙이 명확하기 때문에 몰입하기 좋은 활동이다. 목표와 규칙이 명확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반응할 수 있다. 몰입이라는 상태는 갈등과 고민 없이 우리의 정신력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인데, 목표와 규칙이 애매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행동에 대한 빠른 피드백이다. 피드백이 빨리와야 작업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장기나 체스는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전세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알 수 있고, 운동 경기는 점수를 통해 승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등산가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정상이 가까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음악가는 연주하는 순간마다 자신의 연주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다. 뜨개질하는 사람은 한 땀 한땀이 자기가 의도하는 무늬와 맞는지 곧바로 알 수 있으며, 외과의사는 수술 칼이 동맥을 잘 피했는지 아니면 출혈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몰입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피드백이 없거나 너무 느리게 오기 때문이다.
셋째는 적절한 과제의 난이도다. 아주 어렵거나 아주 쉽지 않아야 한다. 실력에 비해서 너무 어려운 일이라면 긴장과 불안을 경험할 것이고, 너무 쉽다면 따분함과 지루함을 경험할 것이다. 중학생이 구구단을 암기하거나 미적분 문제를 푸는 경우에는 몰입이 일어나기 힘들다. 구구단은 너무 쉽고, 미적분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전해 볼 만한 과제가 가장 좋다.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환경에서 몰입이 발생한다. 몰입을 하게 되면 모든 정신력을 쏟아붓기 때문에 잡녑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어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게 되며, 한 시간이 일 분인 것처럼 금방 흘러갔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중독에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 중독자는 일에 푹 빠져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중독과 몰입이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면은 완전히 다르다. 몰입이 능동적으로 과제를 수행하면서 빠져드는 것이라면, 중독은 과제에 압도당해 자신의 책임과 임무를 망각할 정도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독자들은 다른 활동에는 전혀 몰입하지 못해 피해를 초래하기도 한다. 일 중독자인 경우에는 일에만 매달려 가족도 희생시킨다. 또한 도박 중독은 모든 가산을 탕진하게 만든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은 말할 것도 없다. 몰입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면, 중독은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